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이지 덴노 (문단 편집) === [[붕어#s-3]]([[崩]][[御]]) === || [[파일:a0048039_59443f733f9e6.jpg|width=100%]]||[[파일:KakaoTalk_20190826_015021583.jpg|width=100%]]|| || 1909년 11월에 육군 대연습을 참관하며 보고를 받는 중인 메이지 덴노 || Isabel Weld Perkins가 1914년 그린 초상화 || 기록에 따르면 메이지 덴노는 소싯적엔 고기를 아예 거부할 정도의 채식주의자였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채식보다는 육식을 즐겼고[* 메이지 덴노가 먹은 채소는 아스파라거스밖에 없었다.], 거기에 빵과 커피, 와인을 곁들이는 서양식 생활을 주로 했다고 한다.[* 다만 저녁에는 일본식으로 [[초밥]]과 생선구이를 곁들여서 먹었다.] 여기에 술과 달콤한 [[화과자]]와 [[양과자]]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매일 빠짐없이 먹기까지 했는데 운동은 승마를 제외하면 거의 하지 않아서 말년으로 갈수록 비만이 심해지고 그로 인해 [[당뇨]]까지 앓게 되었다. 여기에 위장염과 신장염까지 겹쳐 고생하던 중 [[1912년]] [[7월 29일]] 22시 43분, [[당뇨]]가 악화된 요독증 때문에 만 59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기존의 일본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던 [[메이지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생활습관의 문제도 있었겠으나 이후 천황가(家) 4대의 사인 및 지병을 살펴보면 가족력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들인 [[다이쇼 덴노]]도 요독증을 앓다가 심장마비로 붕어했으며, 손자인 [[쇼와 덴노]]도 붕어 이전 신장 질환을 앓다가 십이지장 염증으로 하혈, 끝내 장폐색과 간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붕어했으며, 증손자였던 [[아키히토]]는 심장마비로 죽은 조부 다이쇼 덴노의 영향인지 협심증으로 두 차례의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다만 일본 정부가 메이지 덴노의 붕어 일시를 7월 30일 0시 43분이라고 늦춰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는 메이지 시대가 하루 더 이어졌다. 당시 《[[황실전범]]》에 따르면 황태자가 선황 붕어 당일 즉위해야 했으나 사망시간이 너무 늦어 도저히 당일 즉위가 불가능했던 까닭에 이튿날 0시를 넘겨 붕어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즉위할 시간을 번 것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akaoTalk_20190826_015021436.jpg|width=100%]]}}} || || 메이지 덴노의 대상례(大喪礼) || 9월 13일 도쿄 아오야마에서 대상례가 거행되었고, 시신은 구도인 교토로 운구되어 후시미모모야마릉(伏見桃山陵)에 매장되었다. 모모야마릉은 특이하게도 [[무덤]] 봉분이 [[흙]]이 아니라 [[콘크리트]]이다. 지금은 콘크리트가 흔하고 질도 낮은 재료처럼 느껴지지만 1910년대 당시 콘크리트는 서양에서 들어온 신문물이었어서 황릉을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다. 신도 도쿄가 아닌 구도 교토에 매장된 이유는 도쿄로 천도한 후에도 메이지 덴노가 고향인 교토를 그리워하여 자신을 거기에 묻을 것을 유언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다이쇼 덴노]]와 [[쇼와 덴노]]는 모두 교토가 아닌 신도 도쿄의 하치오지에 묻혔고, 메이지는 교토에 묻힌 마지막 천황으로 남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